Spiritual Quest - 철학적 성찰

[독후] 아직도 가야 할 길 – 스캇 펙

인성복 변호사 2023. 3. 22. 16:20

삶은 고해다. 삶이란 문제의 연속이다. 내가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자신과 자녀들에게 고통을 겪는 것이 필요하고 가치가 있다는 사실과, 문제들을 직접 당면해서 고통을 체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가 삶의 문제를 직면하여 성공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고 또 그 과정에서 성장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술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이루어내는 데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기술이 있다. 즉 즐거움을 나중에 갖도록 자제하는 것, 책임을 자신이 지는 것, 진실에 헌신하는 것, 그리고 균형을 맞추는 일이라고 하겠다.

 

즐거움을 나중에 갖도록 자제하는 것.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룬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괴로운 일과 즐거운 일을 계획적으로 짜되, 고통을 먼저 겪은 뒤 즐거움을 갖게 되면 그 즐거움을 더 잘 즐길 수 있데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왜 대다수의 아이들은 즐거운 일들을 뒤로 미룰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는데, 어떤 아이들은 잠재력을 지녔으면서도 그 능력을 성장시키지 못했는가? 부모의 양육방식이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보는 것이 정답이다.

 

세상이 언제나 안전하다고 깊이 느끼는 아이들은 자유자재로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룰 수 있고, 부모와 함께 했던 가정에서처럼 필요한 때면 언제라도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안정감을 갖게 된다.

 

아이들에게 즐거운 일들을 나중에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려면, 부모 자신이 자기 훈련이 잘 된 역할 모델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기 존중감, 자기들의 실존에 대한 안전감을 가지게 하려면, 부모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일관성 있고 변함없는 진지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야만 한다.

 

문제란 그대로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문제들은 직면해서 해결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는 것이며, 영원히 정신적인 성장과 발전의 장애물이 되고 만다.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삶의 문제들을 그때그때 해결해 나가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매일 매일의 일상사 중에서 우리의 책임이 무엇이며, 또 무엇이 우리 책임 밖의 것인가를 분간하는 문제가 인간 실존의 가장 큰 문제인데, 그것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책임을 어디에 둘 것인지 평가하고 또 재평가해야만 한다. 이 평가와 재평가를 제대로 성실하게 하고자 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이러한 각각의 과정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이켜보고 반성하는 습관을 지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가 세상을 직시하고, 또 그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현실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은 많은 경험과 오랫동안의 성공적인 성숙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책임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문제이든 문제의 주체인 당사자가 이 문제에 대하여 책임을 지기 전까지 그 문제는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다.

 

우리가 우리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 행동의 결과로 받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책임지는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백만, 천만의 사람들이 매일매일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시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세력들에 대응하고, 다루는 방법들을 단계적으로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는 자기의 커다란 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정치적 세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슬프게 여기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이 치유되고 건강해지려면 조만간 성인의 생활전체가 개인의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라는 것을 배워야만 될 것이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견해란 지도와 같아서 그걸 지표로 삶의 모든 영역을 판단하게 된다.

 

지도 제작에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도가 정확해질 때까지 우리가 계속해서 지도를 고쳐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수정을 한다든지, 특히 본격적인 개정을 하는 과정이란 괴로운 일이고 고문받는 것처럼 몹시 괴롭다. 이 속에 인류의 많은 정신질환의 중요한 근원이 놓여 있는 것이다.

 

현재의 편안함보다 궁극적으로 옳은 일들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진실 앞에 솔직해야 한다.

 

진실에 충실한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계속적이고 끊임없이 엄중한 자기 성찰을 하는 삶을 의미한다. 또한 자신해서 다가오는 변화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직한 생활이다. 진실과 현실을 우리가 아는 그대로, 가능한 한 정확하게 우리의 대화에 반영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적인 성장이 인간 실존의 목적이라고 믿기 때문에 나는 발전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충실히 따르려고 한다.

 

이것은 참으로 끝이 없는 자기 훈련이라는 짐이다.

 

정직하고 진실한 생활에 따르는 보답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다.

 

성숙한 정신건강에 필요한 것은 상충되는 필요성들, 목적, 의무, 책임, 방향 등을 융통성 있게 균형 잡는 능력이다.

 

균형 잡는 훈련에서 근본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포기를 하는 것이다.

 

나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고통보다 균형을 잃는 것이 궁극적으로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배웠다.

 

인생 여정에 있어서의 전환기들이 왜 이렇게 위기들을 만들어 내느냐 하면, 그 전환기를 성공적으로 지내기 위해 우리는 예전에 중히 여기던 것들과 옛날에 써 오던 방법들, 사물을 보던 방법들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인간 존재들은 가장 황홀하고 영구적이고 확고하며 끝없는 인생의 기쁨을 발견 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이 바로 모든 생의 의미와 더불어 생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의 중심적 지혜이다.

 

아무리 자그마한 형태의 포기라도 인간의 중요한 영적 성장을 위해 필수과제가 된다.

 

훈련이라는 것은 문제해결의 괴로움을 피하는 대신에 문제해결의 괴로움을 건설적으로 취급하는 기술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기술들을 사용할 힘은 사랑에 의해 제공된다.

 

사랑은 자기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이다.

 

사랑이란 행위로 표현되는 만큼만 사랑이다. 사랑은 의지에 따른 행동이며, 의도와 행동이 결합된 결과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 한계들에 대한 지식이 바로 자아영역을 의미한다.

 

여러 해 동안의 사랑, 정신집중, 그리고 자기의 한계 확장은 결국 무엇을 가져다줄까. 그것은 점진적이고도 발전적인 자아의 확장,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의 통합, 이에 따른 자아 영역의 성장과 확장을 연쇄적으로 가져다 준다. 이렇게 우리가 자신을 더욱더 많이 그리고 더욱 오랫동안 꾸준히 자아를 확장해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의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자아와 세계의 거리는 좁혀진다.

 

확실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참된 목적이란 오직 정신적 성장이나 인간의 발전인 것이다.

 

사랑은 자신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이것은 자기 희생이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확대인 것이다. 순수한 사랑은 자기를 채워 나가는 활동이다. 그것은 자신을 위축시키기보다는 확대시키고, 자신을 메마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한다. 진정한 사랑은 그 목적이 항상 정신적 성장이고, 사랑이 아닐 때는 그 목적이 항상 다른 것에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행동하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은 선과 악처럼 객관적인 것이지 순수하게 주관적인 현상이 아니다.

 

사랑하는 일이란 원칙적으로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평범하고 중요한 방법은 말을 들어 주는 것이다.

 

진정한 용기란 두려움으로 인한 위협에 그저 저항하는데서 머물지 않고 뛰쳐나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행동이다. 어떤 단계의 정신적 성장이든, 즉 사랑이든 항상 용기를 필요로 하며 그래서 모험이 되는 것이다.

 

인생의 본질은 변화, 즉 성장과 쇠퇴로 만든 한 벌의 투구와 갑옷이다. 생과 성장을 선택하라. 그것은 변화와 죽음의 가능성을 함께 선택한 것이다.

 

죽음의 교훈을, 즉 우리가 살고 사랑할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시간을 최선으로 이용하고 생을 최대로 충만하게 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진정한 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생의 불안정을 맛보는데서 발견되는 것이다.

 

이러한 큰 변화. 이러한 독립과 자기 결심에로 뛰어 들어가는 일은 어떤 연령에서든지 엄청나게 고통스런 일이고 굉장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다.

 

성장하는 것과 사랑은 무슨 관련이 있으며, 사랑에는 자신의 확장이 포함된다는 것 외에도 새로운 차원에로 자신을 확장해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첫째로 앞의 예들에서 보이는 주요 변화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행동이다. 둘째로 사랑은 자신을 위해 그렇게 크고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키는 동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시도할 용기를 준다.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의 저 깊은 곳에 우리 부모가 어떤 경우라도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마음이 없었다면 나는 계속해서 나 자신의 고유함의 말살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면서 부모들이 더 좋아하는 생활양식을 따랐을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심리적 독립과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어 완전한 자기 자신을 찾는 길을 선택해 나가는 사람만이 자유로이 정신적인 성장의 길을 따라 전진해 나가면서 진정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은 절대적인 자유 선택에 있는 것이지, 남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의 관계라면 그 안에 언제나 책임감이 내재해 있다.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에 대해 참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식적이든지 본능적으로든지 오로지 끊임없는 관계를 통해서만 그러한 성장을 북돋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들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자랄 수는 없다.

 

앞에서 나는 진리에 충실 하는 훈련에 대해 논할 때, 한 사람의 현실에 대한 지도와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과 전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하지만 자신을 새로운 차원과 영역으로 확장하고 변화시켜 사랑이 가득 찬 삶을 영위해 나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모험들을 감행해야 한다. 한 사람의 정신적 성장이라는 여로에는 많은 기점들이 있는데, 혼자이거나 그를 도와주는 치료자와 함께이거나 간에 자기의 새로운 세계관에 따라서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행동을 취해야만 그 기점을 통과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 나 자신 안에 공간을 만들어 주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자리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 바로 자신을 분리시키는 훈련이며 자신의 확대를 요구하는 것이다.

 

온유한 것은 인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알고 느끼는 것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을 생긴 그대로 진실하게 보고 느끼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으로 온유함에 틀림없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정신적 성장이며 정상으로 올라가는 이 고독한 여행은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성공적인 결혼이나 사회의 지지 없이는 이 중요한 여행을 의미 있게 성취할 수는 없다. 결혼과 사회는 그러한 개인의 여행을 지지해 주려는 목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경우가 다 그러하듯 다른 사람의 성장을 위한 희생이 결과적으로는 그와 동일하거나 그 이상 자신의 성장을 보장해 준다. 혼자서 올라갔던 정상에서 자기를 도왔던 사회 또는 가정으로 귀환하는 것은 다시 그 결혼과 사회를 새로운 단계로 올리는데 이바지한다. 이렇게 해서 개인의 성장과 서로의 성장이 서로 서로 의존하고 있으나, 성장하려 할 때에는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 그 힘이 최악의 환경에 처한 대다수의 사람들의 정신 건강을 지켜주고 유지시켜 준다는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다. 정신적인 발전 과정에서 핵심적이고 주된 과제는 자기가 의식하고 있는 자기의 개념을 실제의 그것과 일치시켜 가는 일이다.

우리 몸을 감싸 주는 것은 옷, 살을 감싸는 것은 피부, 뼈를 감싸는 것은 살이며 심장을 감싸는 것은 온 몸이듯, 우리의 육신과 영혼은 하느님의 자비에 감싸여 있다. 더구나 훨씬 포근하게 말이다. 모든 물질적인 것은 낡아서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언제나 온전하다. 어찌됐거나 기적이 어디로부터 오는가에 관계없이 우리의 의식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힘이 우리의 영적 성숙을 도와준다는 사실은 입증할 수 있다.

 

우리 개인과 인류 전체를 떠밀며, 우리 자신의 관성이라는 본능적 저항을 이기고 성장하게 하는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이 힘에 대하여 이름을 붙였다. 사랑이라고.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북돋아 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도라고 정의한 바 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성장하는 것이며, 또 우리가 사랑 그 자체를 위해 일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자신을 드높인다. 자아의 확대라고 정의될 수 있는 사랑은 진화다. 그것도 진행 중인 진화이다. 모든 생명체 속에 존재하고 있는 진화의 힘은 인간의 사랑으로 인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애라고 하는 사랑은 엔트로피의 자연법칙을 무산시키는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의식하다는 것은 함께 안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가운데 무의식적인 뿐이 놀라운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우리가 자신을 의식하는 자아로 정의할 때 무의식은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새로운 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그것이 옳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즉 과거에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시 아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하게 된다는 것은 무의식과 함께 아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지 않을까?

 

인식이란 의식을 무의식과 일치시키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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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무의식이 바로 신이다.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인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신의 일부이다. 하느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야 문제의 핵심에 도달했다. 그것은 명징한 의식을 지닌 채로 신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무의식의 신이라는 뿌리로부터 자라나는 의식의 새싹이 신 그 자체로 성장할 수 있다면, 신은 전혀 새로운 모습의 삶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 개체의 존재 이유이다. 우리는 의식을 지닌 개인으로서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신이 되고자 태어난 것이다.

 

그것은 자아가 없는 무의식 상태의 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자아가 될 수 있는 성숙한 의식적 자아로 성장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자립할 수 있는 성인으로서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독자적인 선택을 할 능력이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자유의지를 하느님의 그것과 일치시킬 수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의 의식적 자아를 통하여 새롭고도 강인한 삶의 형태를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대리자요 그분의 오른팔이요 그분의 일부가 된다. 우리가 의식적 결정을 통해 이 세상ㄹ이 그분의 의지에 따르도록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느님 은총의 대리자가 되는 것이다. 그때야말로 우리 존재 그 자체가 하느님 은총의 한 모습으로서, 인간들 속에서 그분을 위해 일하며, 사랑이 없던 곳에 사랑을 심고, 이웃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며, 인류 자체의 진로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성숙한 사람은 인생의 전문가이다. 그러나 또다른 보다 큰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즐거움이다.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즉 성장하려는 의지는 어린 시절의 부모의 사랑뿐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에 미치는 하느님의 사랑인 은총에 의해서도 자라난다는 것을 나는 믿게 되었고, 그 후부터 나는 그 사실을 증명하려 애써 왔다.

 

당신이 사랑할 수 있고 부지런하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정신치료를 통해 충분히 성숙해진 사람은, 이 무자비하고 힘든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감정을 완전히 벗어나게 되어,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가 있는 권능을 지니게 되었음을 어느 날 갑자기 깨닫게 된다. 이런 자유를 깨다는 것은 놀랍고 두려운 일이다.

 

은총이 실재하고 있음을 일단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 자신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생각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과 의식적 의지를 넘어서 우리의 성장과 진보를 돕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우리의 느낌을 뒤집어 엎을 수 있다. 이러한 힘의 존재는(우리가 일단 그 존재를 용납하기만 하면) 인간의 영적 성장이 인간 자신보다 더 위대한 어떤 존재에게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이 어떤 존재를 우리는 하느님이라 부른다. 은총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하느님이 실재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가 인간 개개인의 영혼이 성장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돕는다는 사실을 가장 명백하게 입증해 주는 증거다. 우리는 이제 변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보살핌과 하느님의 관심을 받으며, 하느님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우주는 하느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도약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더 이상 우주의 길 잃은 미아가 아니다. 오히려 은총의 실재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있음을 가르쳐 준다. 오늘의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인류는 진화라는 뜀틀판위에 있다. 이 뜀틀 넘기에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전적으로 당신의 개인적 책임이다. 이 우주라고 하는 도약대는 우리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뛰어 넘어야 한다.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 따뜻이 맞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고통을 넘어서는 정신적 성장. 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 사랑 즉 은총도 그 성장을 돕는다. 저자는 ‘우리가 하느님의 경지에 이르는 성장을 할 수 있다, 오늘의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강변한다. 은총이 존재한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어느 노승의 깨달음의 게송처럼 가슴 벅찬 선언을 한다. 정신적 성장, 깨달음은 그렇게 자족하고 만족스러우며 감사하고 기쁜 것인가 보다. 충만하고, 사랑과 생명으로 빛나는 것인가 보다.

 

너의 고통스런 마음을 가져오라! 던 말씀처럼, 가슴이 먹먹해 지는 감동이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매여 하루하루 마음이 무너지는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 이오나” “하나님은 내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같은 찬양이 우리 삶에 가능한 이유입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진심으로 그 길을 가고자 원합니다. 나만의 길을 가는 겁니다.

 

경북 청송 주왕산 하산 길 어디쯤 고개들어 하늘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