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ritual Quest - 철학적 성찰

“나를 아는 방법에 대하여”

인성복 변호사 2023. 3. 23. 12:37

1. 예부터 성현들은 삶을 지혜롭게 살기위해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필요한지 여부는 각자에 맡기고, “그렇다면 어떻게 나 자신을 알아 가야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저 나름대로의 개인적 생각을 나열코자 합니다.

 

2. 먼저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분석해달라고 맡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자신이 관찰하고 이해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관찰과 이해는 두뇌 내지 정신의 영역이므로 자신의 정신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이해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문제는 자신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입니다. 우리는 항상 삶의 많은 문제에 사로잡혀 있어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에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거나 이해할 기회를 많이 갖지 못합니다. 또한 어떻게 자신을 관찰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익숙하지 못 합니다. 우리는 삶에 빠져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을 스스로 관찰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관찰해야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계기는 책을 통해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관찰하고 이해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고, 그 ‘필요성을 깨닫는 것’이며, 실제로 자신을 ‘관찰해가는 행동’인 것입니다.

 

4. 그 다음은 자신을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러나 나를 관찰해야 하기 때문에, 관찰하는 자와 관찰의 대상이 같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주의 깊어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관찰의 대상인 나는 항상 어떠한 문제에 사로잡혀 버리고, 그 일에 몰두해버리므로 관찰하는 나를 잃어버리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법은 의도적으로 지속적으로 잊지 않고 주의 깊게 자신을 ‘자각’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행동하는 것, 호흡하는 것 그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 주의 깊게 자각하는 것이 자신을 아는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의도된 행동인 것이며 우리가 자신의 사고나 감정이 이끄는 대로만 행동 한다면 자신을 자각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자각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외면과 내면의 모든 움직임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러한 과정을 거쳐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5. 자기관찰의 끝이 무엇일지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각자가 걸어가 보아 자각으로 깨닫는 길이 있을 뿐일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의미 있고, 우리의 삶이 본질적으로 행복한 것이라면 그러한 자각의 끝에, 사고와 감정, 행동의 끝에, 또 그 모든 움직임의 처음에서부터, 본질적이고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각, 자기관찰을 나는 ‘명상’이라 부릅니다. 명상의 과정은 끝이 없는 길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며, 그 과정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깨달음, 깨침, 자각들에 대한 증언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 길은 자신만의 길입니다. 그 길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해 이곳에서 구체적으로 쓰지는 못하여 감동이 없을 것입니다. 명상의 길을 먼저 가면서 선구자들이 밝혔던 도움이 될 만한 ) 몇 가지 글을 소개하며 두서없는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가. 대승기신론

 

중생이 상념 없는 상태를 통찰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부처의 지혜로 나아가고 있다

 

그 최초의 발단을 안다는 것은 곧 그것에 뒤따르는 모든 상념을 버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현상적 자아를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들(오음)은, 캐고 들어가 보면, 형체(색)와 마음(심)의 두 요소로 귀착된다. 그러나 형체는 결국 마음에 의하여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마음 또한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온 세상을 헤매더라도 끝내 찾지 못한다. 만약 마음은 원래 상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하여 상념은 마음의 헛된 움직임이라는 것을 애써 알아낼 수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실재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식에 파악되는 모든 대상은 오직 마음의 헛된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나타난다. 마음에 헛된 움직임이 없으면 모든 대상이 사라지며 오직 하나인 참마음만 온 세상에 두루 퍼져있게 된다.

 

사실상 증득이라는 것은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말하자면 진여 그 자체의 지적작용이며, 이 상태를 일컬어 법신, 즉 진여 그자체로서의 여래의 몸이라고 부른다.

 

나. 시간도 없는 공간 속에서 (크리슈나무르티)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구조에 일대 변형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근본적이고도 깊이 있게 그러한 변형 내지 대치를 가져올 때 그 변형은 그 사람의 의식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은 절대적인 사실이며, 실체적인 것이다.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유가 있어야 하며, 이 자유는 그 사람의 의식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물로부터 벗어나는 그러한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가 필요한 이유는 의식의 내용물이 사고에 의해서 결합된 모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내용으로부터의 자유, 분노와 야만성으로부터의 자유, 허영과 교만으로부터의 자유, 그리하여 결국 자신을 붙들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얻어지는 자유가 곧 명상이다.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 사람은 모든 복잡다단한 사고와 공포, 고뇌, 절망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것이 기초인 것이다. 사람은 의식 속에 담긴 내용물이 비워지면서 해방이 된다. 그러므로 명상은 의식이 담고 있는 내용물을 비워내는 것이다. 모든 알맹이를 비워내는 것이야말로 명상의 의미이자 심도이다. 그리하여 사고는 이제 종언을 고하게 된다.

 

침묵은 공간을 요구한다. 그 공간은 의식의 전체 구조 속에 존재하고 있다. 사람의 의식 그 자체의 구조 속에는 아무런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많은 공포와 쓸데없는 지껄임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침묵이 존재할 때, 시간을 초월한 엄청난 공간이 자리 잡게 된다. 오직 그 때라야만 영원하고 신성한 것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에 담긴 내용은 사고가 움직인 궤적의 전부로서 권력과 지위와 안전을 바라는 욕망 내지 공포 속에서 추구하는 쾌락에 불과한 것이다. 공포와 쾌락은 같은 동전의 서로 다른 두 면이다. 욕망에 기초를 둔 쾌락의 전체적인 구조와 본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랑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두뇌는 안전을 추구하려는 부단한 습관을 통해서 이미 기계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어떤 명백한 틀을 따르고 그 틀을 일상생활 속에서 무수히 반복하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틀림없이 기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쾌락의 반복과 공포의 중압감, 그리고 그것을 해결할 수 없는 무능만이 존재하는 셈이다.

 

사고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과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사고는 과거 속에 안전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하나의 개념, 즉 이상적인 마음의 상태를 투영시키고 그러한 미래의 희망 속에서 안전을 찾는다.

 

사고가 (그리고 그가 만들어 낸 모든 것)가 결코 안전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그야말로 혈관 깊숙이까지 실제적으로 느끼고 맛보고 관찰해야 한다. 그것의 진실을 보고 나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다. 그것의 진실을 보는 것이 곧 지성이다.

 

사람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욕구는 과연 어떤 것인가? 그가 가진 의식의 한 부분에서는 심리, 생리적인 안전을 찾는 것이 곧 사람의 가장 깊은 욕구이다. 그는 의식주를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모든 것에 대한 확실성을 갖고자 하는 심리적인 갈망도 소유하고 있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투쟁은 바로 이 안전을 확보하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안정이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인 항구성, 즉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한편 안전은 심리적인 항구성도 또한 의미한다. 만일 누구든지 세밀하게 관찰을 해 본다면 모든 것이 심리적으로 매우 순간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유지하고 있는 관계란 심리적으로 볼 때 너무도 불확실한 것이다.

 

인간이 여태까지 발명한 것 가운데는 결코 심리적인 안전이 들어있지 않는다는 사실, 이는 결코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중심이 없을 때, 다시 말해서 사고가 결합시켜 놓은 나라는 구조가 없을 때, 광활한 공간이 나타난다. 그러한 여백이 없다면, 질서도 깨끗함도 자비도 있을 수 없다. 아무런 노력도 없고 의지의 작용도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무한한 공간이 존재하는 곳에서 사는 것은 명상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명상은 어떤 목적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어떤 도달점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명상으로부터 곧 거대한 침묵이 나온다. 결코 배양된 침묵이 아니라,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침묵이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탐구의 과정에 있을 때, 두뇌는 극도로 고요해진다. 그리고 침묵이 있을 때, 위대한 인식이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침묵 속에는 모든 에너지의 총화인 진정한, 비어 있는 공간이 들어있는 것이다. 의식과 그 내용을 탐구하는 과정에 있어서 과연 자기 자신이 그 의식을 관찰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의식이 그 스스로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인지를 잘 찾아내는 작업은 지극히 중요하다. 그 두 가지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식 (욕망, 마음의 상처, 야심, 탐욕 등)을 마치 바깥에서 보는 것처럼 관찰하는 것이냐, 아니면 의식이 그 자체를 알아차리게 되느냐 하는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오직 사고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가능하다. 즉 자신이 만들어낸 의식을 오직 관찰할 따름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고는 자신이 자신을 관찰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오직 관찰만이 있다. 그리하여 의식은 점차로 자신의 내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중심이 있는 곳에는 주변부가 있으며 주변부가 있는 곳에는 저항과 공포의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인 분열이 있다.

 

실로 진리는 개방되어 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는 것은 부처가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또 수많은 선지자, 선각자들도 그 진리를 말하고 있으며, 충분히 많은 근거와 자료, 선각자들의 선물을 우리는 마주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그 스승들로부터 양분을 받아 자랄 것도 필요합니다. 그들을 통해 우리가 가는 길이 옳다는 확신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깨달음을 얻어 줄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우리는 그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목적지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충남 금산군 적벽강
차박도 가능할 것 같은 적벽강
적벽강 근처를 산책하며.....하늘이 웅장했던